화엄강좌 홈     ›     화엄강좌     ›     의상스님과 화엄십찰

1. 華嚴十刹의 檢討
신라의 화엄종은 꾸준히 발전하여 新羅 下代에는 전국의 여러 곳에 화엄종 사찰이 건립되었는데 ‚ 그것은 華嚴十刹로 대표된다. 화엄십찰에 대해 언급한 자료로는 다음의 두 기록이 있다.

a. 海東에 華嚴大學이 十山에 있었다. 즉 ‚ 中岳 公山 美理寺 ‚ 南岳 智異山 華嚴寺 ‚ 北岳 浮石寺 ‚ 慶州 伽耶山의 海印寺 및 普光寺 ‚ 熊州 伽耶峽 普願寺 ‚ 鷄龍山 岬寺 ‚ 良州 金井山 梵魚寺 ‚ 毘瑟山 玉泉寺 ‚ 全州 母山 國神寺 ‚ 潢州 負兒山 靑潭寺 등의 십 여 곳이다.

b. 義湘은 十刹에서 傳敎케 했는데 ‚ 太白山 浮石寺 ‚ 原州 毘摩羅寺 ‚ 伽耶山의 海印寺 ‚ 毘瑟山의 玉泉寺 ‚ 金井山의 梵魚寺 ‚ 南岳 華嚴寺 등이 그것이다.

a는 신라 하대에 ‚ b는 고려 후기에 쓰여진 것이다. 이처럼 a는 신라 때에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 ⌈ 浮石尊者傳 ⌋ 과 ⌈ 法藏和尙傳 ⌋ 을 지은 바 있는 崔致遠에 의해서 쓰여졌 다는 점에서도 그 사료적 가치는 더 크다. a가 신라에 華嚴大學이 있던 ⌈ 十山 ⌋ 을 중심으로 한 기록임에 비해 ‚ b는 화엄종의 사찰이었던 ⌈ 十刹 ⌋ 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다. a에서 가야산에는 2개의 사찰이 있어 전체 10山 11寺가 나열되고 ‚ b에서 산이 아닌 곳에 위치한 비마라사가 기록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a에서는 11개의 사찰을 밝히고 있는데 ‚ b에서는 6寺가 명기되어 있다. 그리고 a의 11寺와 b의 비마라사를 합하면 ‚ 모두 12개의 사찰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 ⌈ 華嚴 十刹 ⌋ 이라는 것은 정확한 10개의 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 ⌈ 海東華嚴大學之所 ⌋ 가 十山에 있었다고 한 a의 기록이 더욱 정확한 표현인 듯 하다. ⌈ 十山 ⌋ 이든 ⌈ 十刹 ⌋ 이든 ‚ 이것은 모두 華嚴敎學이 신라사회에 널리 유포되었던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例證으로 쓰여지고 있었던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崔致遠 이 ⌈ 法藏和尙傳 ⌋ 에 해동에 華嚴大學이 있는 十山에 퍼짐으로써 華嚴이 우리 나라에 빛나게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료 b는 ⌈ 화엄십찰 ⌋ 이 의상이 활동하던 때에 모두 있었던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802년(哀莊王 3)에 창건된 해인사가 ⌈ 화엄십찰 ⌋ 중에 포함 되어 있음은 ‚ ⌈ 화엄십찰 ⌋ 혹은 ⌈ 海東華嚴大學이 있는 十山 ⌋ 은 新羅下代 ‚ 정확하게는 ‚ 해인사가 창건된 802년으로부터 ⌈ 法藏和尙傳 ⌋ 이 쓰여진 904년에 이르는 9세기 때에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 화엄교학이나 화엄신앙이 신라사회에 폭넓게 수용되었던 신라 하대의 ⌈ 화엄십찰 ⌋ 이 성립되고 ‚ 이것은 화엄 종 세력의 확대와 아울러 화엄교학의 유행을 강조해 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 화엄종 세력의 전국적인 확대 ‚ 화엄사찰의 전국적인 분포를 ⌈ 화 엄적인 표현으로 華嚴十刹 ⌋ 이라고 표현한 듯 하다. 사실 ‚ 불교에서는 十方에 있는 무수한 세계라는 의미로 ⌈ 十方刹 ⌋ 이라는 용어를 쓴다. 義湘도 ⌈ 十佛 ⌋ 의 ⌈ 十 ⌋ 을 설명 하면서 ⌈ 無量 ⌋ 의 ⌈ 多 ⌋ 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그리고 崔致遠은 十을 盈數라고 했고 ‚ 또한 十佛의 佛國世界라는 의미로 ⌈ 十刹 ⌋ 이란 어휘를 쓰기도 했다.

화엄십찰 중에서도 浮石寺 ‚ 華嚴寺 ‚ 海印寺 등에 대해서는 약간의 자료가 전하고 있지만 ‚ 그 밖의 절들에 관한 자료는 거의 없는 편이다. 太白山에 화엄종의 根本道場 인 浮石寺가 세워진 것을 文武王 16년(676)이었으니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였다. 義湘이 文武王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교를 펴기 시작했음은 ⌈ 三國史記 ⌋ ‚ ⌈ 三國遺事 ⌋ 등에 다같이 기록했다. 그런데 ⌈ 宋高僧傳 ⌋ 의 義湘傳에는 다음과 같은 浮石寺 創建說話가 전한다.

의상은 귀국 후 山川을 편력했다. 고구려의 먼지와 백제의 바람 ‚ 그리고 마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에서 ⌈ 이 곳은 땅이 신령스럽고 산이 수려하니 참으로 法輪을 굴릴 곳 인데 ‚ 어찌 權宗異部의 무리들이 500명이나 모여 있을까 ⌋ 라고 하였다. 의상은 또 조용히 생각하기를 ‚ ⌈ 大華嚴敎는 福善의 땅이 아니면 흥하지 못한다 ⌋ 고 했다. 그 때 에 善妙龍은 항상 (의상을) 따라 다니면서 수호하고 있었는데 ‚ 의상의 이러한 생각을 몰래 알고 ‚ 곧 허공 중에서 大神變을 일으켜 넓이 1리나 되는 커다란 바위로 변하 여 伽藍 위를 덮고 떨어질듯 말듯 했다. 놀란 群僧들은 갈 바를 모르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의상은 드디어 이 절에 들어가 겨울에는 양지바른 곳에서 ‚ 여름에는 그 늘에서 ⌈ 화엄경 ⌋ 을 강의했다. 많은 사람들이 부름을 받지 않은채 ‚ 스스로 몰려들었다. 이 설화는 ⌈ 삼국사기 ⌋ 나 ⌈ 삼국유사 ⌋ 에 비해 훨씬 앞서서 기록되었다. 현재 부석 사에 이 설화와 관련된 石龍 ‚ 善妙井 ‚ 浮石 등이 남아 있고 ‚ 이 절의 창건자 의상은 浮石尊者로 ‚ 의상으로부터 비롯된 화엄종이 浮石宗으로 불렸던 것은 寺名 浮石에 연 유하고 ‚ 절 이름 浮石은 곧 이 설화와 관련이 있다. 물론 설화는 사료로서의 일정한 한계가 있음은 감안해야 한다. 權宗異部를 法相宗에 속한 승려들로 해석하는 경우 도 있다. 주목할만한 주장이지만 ‚ 화엄과 법상의 심각한 대립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인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善妙와 관련된 설화는 의상을 사랑했던 당나라의 처녀 善妙가 부석사 창건에 도움을 주고 화엄도량을 수호한다는 내용으로 창건자 의상의 공덕을 신비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부석사가 태백산에 세워졌던 이유를 태백산이 신라 오악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라거나 ‚ 고구려와의 접경지대로서의 중요성이 고려된 탓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앞의 인용문에서는 ‚ 의상이 이 곳을 화엄교를 전할 福善의 땅으로 택한 이유에 대해 ‚ 이 곳이 地靈山秀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먼지 ‚ 백제의 바람 ‚ 혹은 마소 등도 접근하지 못하는 궁벽한 곳으로 수행에 적합한 때문이었다고 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부석사의 창건 의도를 왕실의 정치적인 목적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만 ‚ 의상의 뜻은 화엄교의 전파에 있 었다. 부석사에서의 의상의 화엄전교가 성황을 이루었음은 ‚ 의상이 태백산에서 불법을 전해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던 사실이나 ‚ 국왕이 그를 공경하 여 田莊과 奴僕을 이 절에 주려고 했다는 것 등으로 알 수 있다.

최근 李基白은 의상이 오악 중에서도 하필이면 왜 태백산에 부석사를 세웠겠는냐는 의문을 제기하고서 ‚ 태백산은 文殊菩薩의 聖地로 믿어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태 백산이 문수보살의 성지였기에 이 곳에 부석사를 세웠다면 ‚ 부석사의 창건이나 그 이후에도 부석사와 문수신앙이 관련된 자료가 있을 법 하다. 그러나 부석사와 문수 신앙과를 연결지을 만한 어떤 증거도 없다. 오히려 부석사 창건의 사상적 배경에는 淨土信仰이 작용했음이 일찍부터 지적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부석사가 정토신앙을 토대로 이루어졌음은 가람배치의 특이성으로도 알 수 있지만 ‚ 특히 다음 기록은 그 구체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是寺者 義相師遊方西華 傳炷智儼 後潭而所創他 像殿內唯造阿彌陀佛像無補處亦不立影塔 弟子問之 相師曰 師智儼云 一乘阿彌陀無入涅槃 以十方淨土爲體 無生滅相 故華嚴經入法界品云 或見阿彌陀觀世音菩薩 灌頂授記者 充諸法界補處補闕他 佛不涅槃無有闕時 故□□補處不立影搭 此一乘深旨也 儼師以此傳相師 相師傳法嗣 于國師

부석사의 無量壽殿에는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왔지만 ‚ 그 좌우에 보처보살이 없다. 이는 의상의 초창시부터 그랬다. 또한 影塔도 세우지 않았다. 이처럼 부석사는 정토 신앙을 토대로 조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三乘의 정토신앙이 아니라 一乘의 정토신앙에 토대한 것이었다. 부석사가 화엄종의 근본도량이면서도 정토신앙을 표방한 것은 의상의 화엄신앙이 갖는 특징이었고 ‚ 이는 곧 신라화엄교의 특수성이기도 했다. 浮石嫡孫 神琳이 북악 太白山을 중심으로 화엄교학을 크게 진작시키고 있던 8세 기 중엽 ‚ 남악 智異山 華嚴寺가 창건된다. 皇龍寺의 緣起에 의해서이다. 종래 화엄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구구한 設이 있었고 ‚ 화엄사의 창건주인 연기 또한 매우 전설 적인 人物로 알려져 왔다. ⌈ 新增東國輿地勝覽 ⌋ 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煙氣라는 스님이 화엄사를 세웠다고 했다.1636년(仁祖 14)에 쓰여진 ⌈ 華嚴寺事蹟 ⌋ 을 비롯 한 事蹟記들은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인도승 緣起가 세웠다고 했다. 심지어 연기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연을 타고 인도로부터 와서 화엄사를 세웠기 때문에  起라 고 한다는 설화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624년(선덕왕 11)에 慈藏이 중창하고 ‚ 丈六殿 및 華嚴石經은 義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도 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백 제에 속했던 이 곳의 화엄사가 어떻게 신라승이 창건하고 자장이 증축할 수 있었을 것인가 하는 점과 ‚ 의상 이후 번역된 ⌈ 八十華嚴 ⌋ 이 의상에 의해 石刻될 수 없다고 하 는 점 ‚ 그리고 양식상으로 보아 현존 석조물이 모두 8세기 후반으로부터 9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다고 하는 점 등에 의해 ⌈ 事蹟記 ⌋ 등의 기록에 대한 의문은 일찍부터 있 어 왔다. 이와같은 의문은 최근에 발견된 ⌈ 新羅華嚴寫經 ⌋ 에 의해 풀렸다. 寫經의 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天寶 13년 甲午에 시작하여 乙未年 2월 14일 1部를 모두 다 이루었다. 造成한 發源은 皇龍寺 緣起法師가 하시었으니 ‚ 첫째는 恩惠를 주신 아버님의 願을 위한 것이며 ‚ 둘째는 法界一切衆生皆成佛道케 하고자 함으 로써 造成하시었다. 이에 의하면 황룡사의 승려 연기법사가 754년(경덕왕 13) 8월에 ⌈ 화엄경 ⌋ 사경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 2월에 완성했다는 것이다. 그리 고 이 발원의 끝에는 사경에 관여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에 의하면 ‚ ⌈ 사경 작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업무를 담당한 紙作人 ‚ 經筆者의 거주지가 武珍州와 完 山州 ‚ 즉 전라도 지방이다. ⌋ 따라서 이 사경은 연기가 창건한 화엄사에서 이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四獅子石塔 및 四獅子石燈이 연기의 효성을 나타낸 것이기에 孝臺 라고 불린다는 것과 ‚ 의천의 ⌈ 留題知異山華嚴寺 ⌋ 라는 시중에 孝臺라는 용어가 쓰였다는 점 ‚ 그리고 연기가 사경을 조성한 첫째 이유가 아버님의 願을 위한 것이라는 등 의 사실을 연결지어 보면 ‚ 화엄사는 이 사경이 이루어진 8세기 중엽에 연기에 의해 창건되었을 것이다.

海印寺는 順應과 利貞 등이 신라 왕실의 도움을 얻어서 802년(哀莊王 3)에 창건했다. ⌈ 海印寺善安住院壁記 ⌋ 에는 이 절의 창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祖師 順應大德이 貞元 18년(802) 10월 16일에 동지들을 인솔 ‚ 이 곳에 건물을 세웠다. 그 때 聖穆王太后께서 우리 나라에 어머니로 군림하시어 ‚ 戒   ·   定   ·   慧 三學을 아들인 양 육성하였는데 ‚ 소문을 듣고 공경하며 기뻐하여 誓日歸依하고 ‚ 음식을 내리시고 예물까지 곁들여 주셨다. … … 그러나 생도들이 안개처럼 돌문으로 모여드는데 老大 德은 갑자기 入寂했다. 利貞禪伯이 뒤를 이어 공적을 세웠다. 이 기록에는 ‚ 해인사 창건에 대한 聖穆太后의 각별한 배려가 있었음이 강조되고 있다. 성목태후는 昭聖王 의 母다. 따라서 그는 哀莊王의 할머니였다. 그런데 ‚ ⌈ 伽耶山海印寺古蹟 ⌋ 에는 순응과 이정이 애장왕 왕후의 난치병을 고쳐 준 인연으로 신라왕실의 큰 도움을 받았다 고 했다. 그러나 이 ⌈ 해인사고적 ⌋ 이 전하는 내용은 ⌈ 선안주원벽기 ⌋ 에 비해 설화적인 윤색이 많은 것 같다. 애장왕은 800년에 13세로 왕위에 올랐고 ‚ 3년에 金宙碧의 딸을 後宮으로 맞았고 ‚ 6년에 妃 朴氏를 왕후로 삼았던 등의 사실에 유의하면 ‚ 애장왕 2년에 왕후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고적의 설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튼 ‚ 해 인사가 신라왕실의 도움을 얻어 802년에 창건되었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 해인사는 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화엄종 사찰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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