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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4 ‚ 義解 제5박성봉 ‚ 고경식 역

법사 의상은 아버지가 한신이라 했으며 성은 김씨다. 나이 29세에 서울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중국으로 건너가 부처의 교화를 보고자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는데 ‚ 변방의 순라군이 첩자로 여겨 잡아 가둔 지 수 십일 후에야 간신히 풀려나서 돌아왔다. 영휘 초년때 마침 당나라 사신이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자가 있어 그 배를 타고 중국에 갔다. 처음 양주에 머물렀는데 주장 유지인이 의상을 청하여 관청 안에 머무르게 하며 성대하게 대접했다. 얼마후에 종남산 지상사에 가서 지엄을 뵈었다. 지엄은 그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하나가 해동에서 났는데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서 신주까지 와서 덮으니 ‚ 그 가지 위에는봉황새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자 마니보주가 하나 있었으며 그 빛이 먼 곳까지 비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스러워서 절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 리니 의상이 오므로 지엄은 특별한 예로 그를 맞아 조용히 말했다.

“   어젯밤 내가 꾼 꿈에 그대가 올 징조였구려.   ”

하며 입실할 것을 허락하니 의상은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隱微한 부분까지 해석했다. 지엄은 영질을 만난 것을 기뻐하여 새로운 이치를 터득하게 되니 ‚ 이것은 깊이 숨은 것을 찾아내서 남천이 그 본색을 막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때에 본국의 승상 김흠순과 양도 등이 당나라에 갇혀있었다. 당나라 황제 고종이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 하매 흠순 등이 남몰래 의상에게 권하여 먼저 돌아가도록 하였다. 함형 원년 경오(670)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이 일을 조정에 알리니 ‚ 신인종의 고승 명랑에게 명하여 밀단을 가설하고 비법으로 기도해서 국난을 면하게 할 수 있었다.

의봉 원년(676)에 의상은 태백산으로 돌아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을 폈더니 많은 영감이 나타났다. 종남문인 현수가 수현소를 지어서 부본을 의상에게 보낸 뒤 은근한 뜻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   서경 승복사 중 법장은 해동신라 화엄법사의 시자에게 글을 드립니다. 한번 작별한 지 20여년이 되었으니 사모하는 정이 어찌 마음 속에서 잊겠습니까. 더욱이 연기와 구름이 1만리나 되고 바다와 육지가 1천겹이나 쌓였으니 ‚ 이 몸이 다시 뵙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겨오며 회포에 연연함을 어찌 말로 다하리이까. 전생에 인연을 같이했고 ‚ 금세에 함께 학업을 닦은 탓으로 이 과보를 얻어서 대경에 함께 목욕하고 ‚ 특별하신 선사의 은혜로 깊은 경전의 가르침을 입게 된 것입니다. 우러러 듣건대 상인께서는 고향에 돌아가신 후로 화엄경을 강연해서 법계의 무애한 연기를 선양하여 ‚ 겹겹의 제망으로 불국을 새롭게 하여 중생에게 이익을 줌이 크고 넓다고 하니 기쁜 마음 더합니다. 이로써 여래가 돌아가신 후로 불교를 빛나게 하고 법륜을 다시 굴려 불법을 오래 머물게 할 분은 오로지 법사이심을 알겠습니다. 법장은 발전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주선함도 더욱 모자라니 우러러 이 경전을 생각하매 선사께 부끄러울 뿐입니다. 오직 분수에 따라 받은 것을 잠시도 놓칠 수 없으니 이 업 의지해 내세의 인연을 맺게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다만 스님의 장소는 뜻은 풍부하오나 글이 간결하여 후세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도 같습니다. 그러하와 제가 스님의 깊은 말씀과 미묘한 뜻을 기록하여 의기를 이루었습니다. 요즈음 이를 승전법사가 옮겨 써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그 지방에 전할 것입니다. 하오니 상인께서는 그 잘잘못을 상세히 검토하시어서 가르쳐 주시면 행이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기는 마당히 내세에서는 捨身受信하여 함께 노사나불의 이와 같이 끝없는 묘법을 듣고 이와 같은 무량한 보현보살의 원행을 수행 한다면 남은 나의 악업은 하루 아침에 떨어질 것이옵니다. 바라는 바 상인께서는 옛 일을 잊지 마시고 諸趣 한가운데서 정도로써 가르쳐 주시옵소서. 인편이 있거든 때때로 안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불비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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