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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전후 오랜 전쟁에 시달린 대중들의마음을 화엄수행과 신앙으로 달래준 분이 있으니 海東華嚴 初祖로 널리 알려진 義湘(625-702)스님이다.

의상(625-702)은 義相 또는 義想이라고도 표기되며 ‚ 해동화엄초조라는 별칭외에도 浮石尊者. 義持 ‚ 圓敎國師 등 여러가지가 있다. 이는 해동 불교사에서 의상이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의상의 생애에 대해서알 수 있는 전기자료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 三國遺事 › 의 前後所藏舍利조에 수록되어 있는 浮石本碑와 義湘傳이 있고 ‚ 의상생애의 전반을 다루고있는 유사의 ‹ 義湘傳敎 › 조와 ‹ 宋高僧傳 › 의 唐新羅國義湘傳 및 白華道장發文略解도 의상전 연구에 중시되고 있다. 이외에 의상 전기의 편린을 보이고 있는 자료들이 많다.그런데 이들의 상전의 자료들은 동일 사건을 다룸에 있어서도 내용상 상위점이 많으므로 신빙성에 문제가 있기는 하나 ‚ 또 각기 다른전적에서는 전하지 않는 사실을 담고 있는 부분이 많아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의상의 전기자료중 가장 상치되는 곳은 의상의 생몰연대 ‚ 출신 ‚ 출가시기 ‚ 입당구법의 일 등이다. 이를 가장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부석본비를 중심으로 하고 타전기 도 참고하여 먼저 의상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의상은 김씨로서 아버지는 金韓信이고 ‚ 신라 진평왕 47년(건복 42년 ‚ 당無德 8년 625)에 태어나 78세(702)에 示滅하였다. 의상은 관세에 皇福寺에서 출가하여 8세위인 元曉(617-686)와 함께 입당 유학을 시도 하게 된다. 25세(650)때의 육로를 통한 제1차 시도는 실패하고 다시 해로를 이용하여 36세(용삭 원년 신유 ‚ 661)에 입당하게 된다.

이때에 원효는 도중에서 발길을 돌리고 ‚ 의상은 당 사신의 배에 몸을 의탁하였던 것이다. 劉至仁을 만나 풍족한 공양을 받으며 그 딸 善妙와 인연을 맺고 ‚ 다음해(662) 지상사智儼(602-668)을 찾아가니 지엄이 특별한 예로 맞았다 한다. 그 후 의상은 화엄교학의 진수를 전수하였고 지엄의 입적 3개월전인 7월 15일에 화엄일승법계 도를 지어 인가를 받았다.의상은 스승 지엄의 입적후 金欽純의 권유로 당 고종의 신라 침공을 알리기 위해 귀국을 앞당기게 된다.

의상의 우국의 정은 문무왕의 경성 축성을 중지시킨 예(동왕21년 680) 에서도 잘나타나 있다.의상은 신라로 돌아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태백산에 浮石 寺를 창건하여 화엄의 근본도량을 삼고 각처에서 교화활동을 펴 나갔다.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에는 의상의 교학이 십산에 퍼졌다고 하여 십여소를들고 있으니 이들은 華嚴十刹이라 명명되고 있다. 이는 의상이 제자들의 교육과 교화를 중시하였던 결과이기도 하니 ‚ 부석사 40日會의 일승십지문답 ‚ 황복사에서의 법계도 강의 ‚ 태백 대로방에서의 行境十佛 강의 ‚ 소백산 錐洞에서의 90일간 화엄경 강의가 있었음이 전해진다.

추동에서 화엄경을 강의할 때는 3천명이나 운집하였으며 ‚ 강의의 동기가 제자인 眞定스님의 어머니를 천도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의상이 제자를 생각하는 마음과 제자교육에 임하는 진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십대제자가 亞聖으로 칭송받았으며 이들중 四英과 登堂睹奧者 四人도 전해지고 있다.이처럼 의상 문하에 많은 제자들이 있어 스승의 사상을 계승하였고 하엄십찰이 대를 이어 세워져 갔으니 ‚ 의상의 화엄학은 사자상승 계보를 형성하며 華嚴宗(浮石宗 또는 義持宗) 이라는 교단적 발전을 이루어갔다.

의상은 제자들을 육성하고 화엄대찰을 건립하는 등 실천수행을 근본으로 삼아 실행을 통한 화엄의 선양에 전념하였던 것이다.그러한 실천운동을 근본으로 삼은 의상 화엄사상의 특질은 그가 서민 불교적인 미타정토 신앙을 중요시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부석사에 무량수불을 모신 것이라든지 동해 낙산에 관음진신주처의 도량을 개설하는 등 ‚ 의상은 화엄사상에 미타 관음신앙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의상화엄 학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의상의 실천적 생애와 그가 끼친 발자취는 당시 신라인들에게 있어서 금산보개 여래의 화신으로 까지 받들게 했다. 이같이 의상은 실천 수행 중심이었고 저술은 다음의 8부가 헤아려지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 華嚴一乘法界圖 › 1권과 ‹ 人法界品抄記 › 1권(실) ‚ ‹ 華嚴十門看法觀 › 1권 (실) ‚ ‹ 阿彌陀經義記 › 1권(실) ‚ ‹ 諸般請文 › (실) ‚ ‹ 白華道장發願文 › (단간 현존) ‚ ‹ 華嚴一乘發願文 › ‚ <投師禮> 이다. 이중에 일승법계도를 제하고 현존하는 것은 전부 발원문류이다.

이들 의상의 발원문은 한국에 있어서 발원문의 효시가 아닌가한다. 화엄 행자로서의 의상의 면모가 여기서도 나타난다고 하겠다.이러한 발원문과 화엄일승법계도에 의상의 화엄사상이 압축되어 있으며 ‚ 그 사상과 교학은 면면히 이어져왔다.

一然은 일승법계도가 一乘의 樞要와 千載의 龜鏡을 망라하고 있다하며 솥의 국맛을 맛보는 데는 한점 고기면 족하다고 극찬을 하고 있다. 일승법계도는 그 핵심이 되는 7언 30구 2백10자의 詩인 法性게와 法界圖印 그리고 이를 해석한 法界圖記의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

법성게에서는 화엄법계가 사사무애법계로서 십현연기 ‚ 육상원융의 모습인 소이를 法性 ‚ 海印 三昧 ‚ 舊來佛을 통해 性起 세계임을 잘 드러 내고 있다. 의상이 화엄법계 를 성기세계로 이해한 것은 그가 화엄행자로서 실천수행에 역점을 둔 화엄행자로 살게한 원동력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상의 화엄성기사상은 禪과의 교섭하에 禪嚴一致를 이루어 한국선을 이해하는 관건이 되고도 있다.

한국화엄의 주류를 이루는 ‚ 의상을 이은 화엄종은 이 일승법계도를 중심으로 연구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으니 ‚ 법계도기총수록과 고려 均如의 일승법계도원 통기 ‚ 조선 雪岑의 대화엄일승법계도주 ‚ 有聞의 법성게과주등 법계도에 대한 주석이 신라 ‚ 고려 ‚ 조선을 통하여 계속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대소 설재에 법성게가 의식속에 스며든 이래 지금도 전사찰 에서는 법성게가 거의 매일 독송되고 있는 것만 해도 의상의 덕화를 다시 한번 음미해 봄직하다고 하겠 다. – 해 주 (동국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