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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의상스님의 정치적 입장

의상스님이 신라 중대의 국가 권력과 어떤 관계에 있었느냐는 것은 퍽 재미있는 문제이지만 ‚ 그것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는 편이다. 다만 그것을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상스님의 역할이 신라 중대의 정치 상황과 무관하였다고만은 할 수 없다. 간접적인 사료에서 이지만 그의 신분이나 정치적 입장 등을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지적했지만 의상스님의 부친은 한신韓信인데 ‚ 김씨 또는 박씨로 알려져 있다. 한신이 신라사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또는 속성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 의상스님의 신분은 높은 귀족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론되기도 한다. 한편으로 한신은 진평왕 51년 용춘龍春 ‚ 서현舒玄 ‚ 유신庾信 등과 함께 낭비성전투娘臂城戰鬪에 참가하여 전사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성이 두 가지로 기록된 경우는 신라사에서 흔히 있는 현상으로 ‚ 그것은 각각 부계성父系姓과 모계성母系姓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럴 경우 그것은 오히려 의상스님이 높은 귀족 신분 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모르긴 해도 의상스님의 속성俗性은 김씨임이 분명하며 혹 박씨는 그의 모계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속성이 박씨였다는 ⌈ 송고승전 ⌋ 에서도 의상스님이 계림부인鷄林府人이었다고 함으로써 ‚ 진골귀족이었음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의상스님이 비록 진골귀족이었다 하더라도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것은 아닌 ‚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족적族的 배경이 약하다고는 했지만 의상스님은 진골귀족이었고 ‚ 원효스님과 더불어 구도수행은 물론 입당구법入唐求法할 정도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당대의 실력자였던 김춘추金春秋 일파와 연결되어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추측과 연관시켜 황복사皇福寺는 사륜계四輪系가 경영하는 원찰願刹이라는 주장은 유념될 수 있다. 물론 황복사가 사륜계 왕실에 의해 경영되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 다. 당시 국가적인 사찰인 황룡사皇龍寺가 진흥왕眞興王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어쩌면 태자太子인 동륜계銅輪系에 의해 장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황복사는 그 명칭으로 보아 왕실과 연결된 사찰임이 분명하므로 사륜계의 원찰로 보아 크게 무리일 것 같지 않다. 황복사가 반드시 사륜계 왕실의 원찰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왕실 과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므로 ‚ 의상스님이 출가할 당시의 황복사는 그 사회의 실질적인 주도 세력인 사륜계와 연고되었다. 그러므로 출가 당시에 의상스님 은 이미 김춘추 세력과 연결을 가졌다. 의상스님은 문무왕 1년에 당의 사신이 돌아가는 배에 동승하고 있었다. 입당하면서 당 사신의 배를 탈 수 있었다는 것은 의상스 님이 평범한 구도자였을 것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그가 양주揚州에 귀착歸着한 후 주장州將의 환대를 받아 아문衙門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이러한 생각을 보다 확신시켜 준다. 아마 의상스님은 이미 신라 조정의 배려 아래 중국으로 유학하여 화엄사상의 수학에 들어 갔을 법하다.

의상스님이 귀국하게 되는 사정은 어쩌면 그가 바로 왕실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다음기록을 유념해 보기로 하자.
본국의 승상承相 김흠순(一作 仁問) ‚ 양도良圖 등이 당에 가서 갇힌 바 되었다. 고종高宗이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동정東征하려 하니 ‚ 흠순 등이 가만히 의상스님 에게 일러 먼저 귀국하게 했다. 함형咸享 원년元年(문무왕 10년 ‚ 670) 경오년庚午年에 환국하여 그 사정을 조정에 알렸다. 신인대덕神印大德인 명랑明朗스님에게 임시로 밀단법密壇法을 설設하여 이를 물리치게 하니 ‚ 이에 국난을 면하였다.

(   ⌈ 三國遺事 ⌋ ‚ 권4 ‚ 義湘傳敎條)
신라와 당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빚어지자 ‚ 699년에 김흠순과 김량도金良圖가 사죄사謝罪使로 당에 파견되었다가 당의 조정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의상스님 은 이러한 당나라의 긴장감과 침략을 본국에 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의 귀국 종용에 직접 관여한 사람은 바로 김인문金仁問이었으며 ‚ 당시 당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 ‚ 김양도 등도 이 일에 관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