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강좌 홈     ›     화엄강좌     ›     의상스님과 화엄십찰

오늘날 이 시대에 해당하는 物的 造形을 전해주고 있는 원주 근교의 사찰로서는 흔치 않은 편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다시 日政期의 혼란된 시절에 원주 지방으로부 터 移置한 수많은 石造遺物에 대해서도 새로운 주목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중에서도 한국 石造淨屠 가운데 最古의 위치에 있는 傳興法寺廉居和尙塔(국보 제104 호)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명이 있어야 하리라 본다. 만일 이것이 興法寺址로부터 移置된 것이 아니라면 이와 同代의 다른 사찰에서 그 出世에 대한 해명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신라 9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사찰의 존재를 다른 곳에서 찾지 못하는 한 廉居浮屠와 비마라사지를 연관하여 생각해 보는 것도 寺地해명을 위 한 새로운 시도가 될 것이다. 이와함께 우리들은 다시 원주 시내에 전해지는 現存 유물에 대하여 우리의 시선을 돌려야 할 것이다. 원주 시내에도 신라 下代에 속하는 造形을 지닌 石造遺物들이 간혹 보인다. 이들은 원주 鳳山洞의 傳天王寺址에서 出土되어 현재 시내의 法雄寺 1군 군인법당에 보관되어 있는 塔身의 四方佛 또는 一山 洞 路邊에 있는 廢塔材 등에서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그 규모가 小塔으로 보이므로 신라 10대찰의 하나인 비마라사의 유물로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다시 시내 봉산동 일대에서 그와 같은 寺址에 해당하는 遺構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곳에는 현재 원주 경찰서와 교육청 ‚ 그리고 수많은 민가가 밀집 해 있고 또 원주 국민학교의 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다. 필자는 일단 이곳 민가가 밀집해 있는 넓은 평지 일대를 비마라사지로 보고자 한다. 그와같은 立論의 가장 유력 한 근거로는 이곳 일대 남쪽의 原州川 근처에는 신라시대의 作으로 보이는 幢竿支柱가 서 있으며 이 支柱와 이웃한 민가에서는 잘 손질된 臺石 및 礎石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수많은 瓦片이 출토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遺構들은 이곳 寺址內에 존재했던 것으로서 今世紀에 들어와서 주택의 건립에 따라 攪亂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 에도 수년전 필자가 이곳 일대의 조사에서 확인한 교육청 정원의 방치된 石造佛像 등의 遺構와 함께 광활한 주변 일대가 古寺址로 추정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곳 일대 에서 ⌈ 毘摩羅 ⌋ 란 表記에 가까운 銘文이 있는 瓦當 또는 접시가 습득되었다는 傳言과 함게 金銅佛像이 발견되었다는 傳聞도 있으므로 이곳 寺址에 대한 주목은 더욱 요 청되는 것이다. 古代 寺院址의 조사에 있어서는 이와같은 物的資料가 때로는 결정적 역할을 해 주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寺址內에 遺存해 있는 遺蹟   ·   遺物은 움직 일 수 없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특히 이들 가운데서도 寺址 남쪽에 서 있는 幢竿支柱는 이 절의 寺格 및 宗派를 대변해 주는 것으로서 寺址해명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됨은 말할 것도 없다. 이 支柱가 있는 정확한 위치는 원주시 봉산 2동 함재기씨 집 바로 앞이 된다. 이곳 주변에는 간혹 옛날의 瓦片과 함께 石材들이 있어 주목되는 곳 이다. 잠시 이 幢竿支柱를 살펴보면 支柱중간에는 幢竿을 세웠던 臺石이 있는데 이는 상당히 큰 편이다. 지상으로부터의 높이는 약 80cm ‚ 폭은 132cm로서 거의 地 上에 노출된 상태로 있다. 중앙의 幢竿을 받쳤던 底孔은 직경 32cm 깊이 24cm로서 臺石양 옆에는 홈을 파고서 支柱를 매우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그리고 支柱의 아 래쪽에서는 固定孔을 볼 수 없고 다시 윗쪽에서 약 41×13cm의 직사각형의 固定孔을 볼 수 있다. 이의 깊이는 약 12cm로서 홈이 파져있다. 이 당간지주는 아랫쪽 臺石에 의해 매우 단단하게 고정되어 안정감을 찾을 수 있으나 불행히도 두 개의 石柱 가운데 하나는 이미 부러져 주변에 쓰러져 있다. 부러진 支柱는 三切되었지만 이 의 復元은 가능한 편이다. 支柱의 높이는 약 4m에 달하며 아무런 조각이나 장식은 없고 매우 단조로운 편이다. 다만 上端部를 心形으로 약간 뾰족하게 나타낸 것이 눈 에 뜨인다. 구태여 이 支柱와 비슷한 것을 지적한다면 榮州 宿水寺址 幢竿 ‚ 그리고 浮石寺의 당간지주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同代의 당간지주에서 간혹 볼 수 있는 것처럼 支柱 바깥쪽에 兩側의 모(角)을 죽이고 넓은 縱帶를 내는 등의 수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무튼 이와같은 당간지주는 寺域에 세워지는 것으로서 浮石 寺나 海印寺 ‚ 梵魚寺 등 여타 사찰에서는 모두 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 봉산동 寺址의 당간지주는 同代의 신라시대에 속하는 유물로서 주변의 石造破佛이나 여타 傳言을 종합해 볼 때 신라 10대찰의 하나인 비마라사지에 소속 된 것으로서 우리의 심증을 굳힐 수 있는 것이다.

⟨   Ⅳ   ⟩
지금까지 우리들은 비마라사지에 대한 해명을 위하여 몇가지 試案的 方法을 시도해 왔다. 문헌 기록과 함께 地理的 여건 ‚ 그리고 物的 造形을 추구하여 당대의 寺址 해명을 위하여 다각적인 시도를 전개했다. 그 중에서도 확실한 물적증거로서 당간지주를 지목했고 그외 이곳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 몇몇 유물의 존재 ‚ 또는 破佛에 대해서도 주목해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와같은 외적 조건으로서는 우리의 요구를 충족해 줄 정도로 만족한 결과는 되지 못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들은 이곳 원주 일대에서 그와같은 大刹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곳 寺址 일대는 今世期 前半까지만 해도 넓은 松林속에 꿩 등 짐승들이 서식했고 ‚ 또 村老들의 증언으로 봐서 古代寺址로 확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함께 이곳에 전해지는 몇몇 유물들이 신라 통일기의 ?석조유물들이라는 점과 함께 광활한 寺址는 大刹의 규모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義湘의 十刹 가운데 비마라사만이 山名이 아닌 地名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은 유별나게 雉岳山內에서 그의 존재를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원주와 至近한 平地인 이곳 봉산동을 지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이 寺址 해명에 일말의 단서가 되고 있음은 물론 앞서 말한 당간지주는 신라통일기의 뛰어난 石造遺構라는 점에서 역시 비마라사지는 원주지역의 이름 모를 별난 사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眼前에 전개되고 있는 鳳山洞의 이 寺址로서 역사의 迷妄을 벗겨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신라 화엄十刹 가운데 대표격인 浮石寺가 그 創建緣起에서 말해주는 바와같이 지리적 요인에 따라는 護國寺刹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 멀리 신라의 변방 小京으로서의 원주 땅에 건립된 비마라사 역시 그 機能的인 면에 있어서 국방적으로도 중요한 사찰 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原州가 국방상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과도 일맥 상통하는 결과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함께 寺址內에서 出土되었다는 銘文을 가진 유물들의 출현을 기대하면서 광활했던 비마라사지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는 것은 신라의 大華嚴法師 義湘이 주고간 文化史的 업적에서 더욱 그러하다. 동시에 이곳 古代 寺院址 뿐만 아니라 원주의 문화유적을 길이 보존하기 위해서도 이 幢竿支柱에 대한 保護策과 礎石이 露出된 寺址 일부를 확보하여 事蹟址로 指定 보호하는 등 그 보존대책이 시급하다 하겠다. ? ⟨   ※ 참고문헌 : 新羅 毘摩羅寺址考(義湘 華嚴十刹의 一考察. 張忠植-동국사상 12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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