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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과 중창에 얽힌 이야기들

의상과 화엄학의 정치사회사 Buseoksa

부석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 (義湘 625-702) 이 창건한 사찰이다. 한국 사찰들의 창건주로 많이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구려의 아도화상 ‚ 백제의 마라난타 ‚ 신라의 자 장과 원효 ‚ 의상 ‚ 그리고 신라 말의 도선 대사로 역사상 지명도가 매우 높은 승려들이다. 특히 의상의 인기는 가장 높아서 그가 창건했다는 사찰이 줄잡아 100여 개 소 가 넘지만 ‚ 대부분은 사찰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위해 나중에 가식된 것이다. 기록에 나타나는 의상 창건 사찰은 양양 낙산사와 부석사뿐이고, 유명한 화엄십찰 마 저도 의상의 제자들에 의해 창건된 것이 대부분이다. 더욱이 낙산사는 한국전쟁 중에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어서 ‚ 의상 자신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부석사가 유일한 곳이다.

삼국 통일기 직후 ‚ 분열되었던 세 나라 백성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새로운 사회사상과 통치이념이 필요하던 시기에 등장한 의상은 통일과 융합을 원리로 삼는 화엄사 상을 수입함으로써 ‚ 종교 지도자로서 뿐 아니라 새로운 정치세력의 강력한 자문역으로 지위를 쌓았다. 의상에 대한 여러 측면의 평가 가운데 한가지는 그가 매우 정치 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이다.1) 의상은 비록 한미하기는 하지만 진골계층의 가문에서 출생하여 20세를 전후해 출가한 것으로 전한다. 의상은 젊은 시절 두차례에 걸쳐 당나라에 유학을 시도하였다. 첫 시도는 650년 아직도 세 나라가 대립하던 시기에 과감히도 고구려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려고 고구려에 밀입국하였으나 ‚ 곧 고구려 군에게 붙잡혀 신라로 호송되었다. 이때 동행한 동료가 바로 원효 대사였다. 굳이 고구려를 거치는 육로를 택한 이유도 정치적 첩보활동에 목적이 있지 않았나 추측된 다. 10년 후인 661년, 백제 멸망 직후에 경주에 왔던 중국의 사신을 따라 드디어 중국 유학의 꿈을 이루게 된다. 왕권의 비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국가 공식적인 유 학생이었던 것이다.

선묘낭자와 부석사 창건 Buseoksa

그가 도착한 곳은 당시 중국의 중요한 무역항이었던 량쪼우揚州였고 ‚ 저 정부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 한 고관의 집에 유숙하게 된다. 그 집에는 어여쁜 낭자가 있었으 니 그녀의 이름은 선묘善妙로 ‚ 부석사 창건에 중요한 인물이 된다. 의상과 선묘 ‚ 두 청춘남녀 사이에는 국경과 종교적 신분을 초월한 애절한 사랑이 싹텄다. 그들의 관 계가 어느 정도까지 깊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 670년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을 입수한 의상이 급거 귀국할 대 ‚ 동반 귀국이 좌절된 선묘는 바다에 투신하여 이루지 못한 세 속의 사랑을 마감하였다.3)

의상이 귀국한 후 양양에 관음도량인 낙산사를 창건하고 ‚ 경주에서는 황복사에 머무르면서 문무왕의 고문으로 활약한 것 같다. 또한 676년 왕명에 의하여 태백산(정 확히는 소백산) 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드디어 화엄의 교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역시(송고승전)에는 창건 당시의 사정이 전하고 있는 바 ‚ 의상이 자신의 교학을 펼치 기에 적합한 곳을 마침내 발견하였는데 ‚ 이곳에는 이미 다른 종파의 무리(한정한문)500명이 둥지를 틀고 있어 부석사 창건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때 선묘낭자가 현신 한 용이 나타나 공중에서 거대한 바위를 떨어뜨렸고 이 이적을 본 기존의 무리들이 항복하여 부석사의 창건이 이루어진다.

이 설화의 사실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당시 의상의 정권내적 위치나 그의 화엄교학의 내용을 본다면 ‚ 부석사 창건은 통일 직후 신라에 있어서 매우 정치적인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비록 통일전쟁에서 승리는 하였지만 이후 신라왕권의 영향력은 소백산맥 이남을 벗어나지 못했고 ‚ 특히 당시에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의 반항이 아 직 수그러들지 않았던 혼란기였음을 ‚ 그리고 부석사의 입지가 옛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관문이었던 죽령을 경영할 수 있는 곳임을 되새겨 본다면 ‚ 부석사의 창건은 바 로 신라 국경의 중요한 전략적 거점을 확보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상이 귀국 직후 동해안의 국경 지점에 낙산사를 창건한 사실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 석할 수 있고 ‚ 부석사 창건을 방해한 권종이부란 다름 아닌 고구려 부흥세력이 아닐까 추정된다. 정치 군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 소백산맥의 연봉들이 중첩되어 전개되 는 장엄한 파노라마를 볼 수 있는 부석사의 입지선책의 또다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림에 의한 중흥 Buseoksa

창건에 지대한 도움을 준 선묘낭자와 관련하여 무량수전 서쪽에 뜬돌(浮石)이 놓여 있고 ‚ 동쪽에 조그마한 선묘각이 세워졌다. 또한 무량수전 본존불 아래부터 앞마 당 지하에 돌로 만든 용을 묻어 영원한 수호신으로 삼았다고 전하며 ‚ 일제때 행한 발굴에서 허리가 잘린 석룡의 몸체가 앞마당에서 출토되었다는 기록이 있다.4) 지금 보는 바와 같이 대석단을 쌓은 기본구조가 완성된 것은 9세기 후반 경문왕(861-874)라고 추정된다. 대석단의 수법이 이 시기에 세워진 원원사 망해사 등과 유사하 고 ‚ 무량수전 앞의 석등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또 9세기 후반은 의상의 법손인 신림神林과 그 후예들이 주축이 되어 부석사 중심의 화엄교파가 신라 정부 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일세를 풍미할 때이기도 하였다. 부석사의 대석단은 막대한 인력이 소요되는 대역사이며 ‚ 변방 첩첩 산중의 사찰이 자체적으로 수급하기에는 턱없는 공사였기에 정권적 후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의상 당시 창건 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비록 부석사를 창건하였다고는 하지만 ‚ 의상은 부석사 에만 머물지 않고 태백산과 소백산 일대의 여러 곳에 초막과 토굴을 마련하여 제자들에게 화엄강론을 열었다고 기록에는 전한다. 이 기록들을 근거로 본다면 ‚ 부석사 가 지금과 같은 대가람을 구성하였다면 의상이 여기에 머물지 않고 수천 제자들을 거느리고 여러곳을 전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초창 당시 부석사는 초막 몇 채가 있 는 매우 청빈한 수도원의 모습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하기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하면 ‚ 창건주 의상은 부석사 가람의 자리를 잡았으며 ‚ 그 법손 신림대에 이르러 대가람 의 건축적 틀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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