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강좌 홈     ›     화엄강좌     ›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전설

“   의상대사와 선묘의 전설이 서린 동주   ”
소백산 남록 영주시 부석면에 자리한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16년(676)에 의상(義湘)대사가 왕명을 받고 창건한 절로서 그가 화엄종을 처음으로 편 곳
으로 유명하며 등주(봉래)와 관계가 있다. 중국 북송때(988) 편찬된 ⌈ 송고승전(宋高僧傳) ⌋ 에 의상대사와 선묘(善妙)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의상은 신라 경주사람으로서 20세때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대련의 노철산에서 바다를 건너 등주(봉래)에 도달하였다. 의상은 한 신도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집에는 선묘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그녀는 의상의 용모가 매우 뛰어남을 보고 가까이하려고 했지만 의상은 ‘ 이미 속세를 떠난 몸이기에 그 청을 들어줄 수 없다 ’ 고 했다. 선묘는 의상의 굳은 의지를 보고 도심을 일으켜 그 앞에서 다음과 같이 대원(大願)을 발했다. ‘ 세세생생 스님께 귀명하겠습니다. 대승을 배워 익히고 대사를 성취하겠습니다. 제자는 반드시 시주가 되어 스님께서 필요로 하는 생활품을 바치겠습니다 ’ 그 후 의상은 장안 종남산에서 지엄(智儼)스님으로부터 10년간 화엄학을 배우고 귀국길에 올랐다. ‘ 의상대사를 선창에서 보았다 ’ 는 소문을 들은 선묘는 그동안 준비해 두었던 법복과 생활집기를 들고 뒤쫓아 갔으나 배는 이미 떠난 뒤였다.

선묘는 ‘ 내 몸이 변해서 대룡(大龍)이 되기를 비옵니다. 그래서 저 배가 무사히 신라땅에 닿아 법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비옵니다 ’ 하고 몸을 바다에 던졌다. 용으로 화한 선묘는 황해만리길을 의상을 호위하며 무사히 신라땅에 닿을 수 있도록 도왔다.
왕명으로 의상이 봉황산에 절을 지으려 할 때 거기에 웅거해 있던 무리들이 방해했다. 이때 선묘는 큰바위로 변하여 가람의 지붕위에서 떨어질까 ‚ 말까하는 모양을 하 자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에 의상은 절에 들어가 화엄도량으로 크게 일으켰으며 선묘는 석룡(石龍)이 되었는데 ‘ 아미타불 바로 밑에서 머리부분이 시작하여 석등아래 꼬리부분이 묻혀있다 ’ 고 한다.

현재 부석사 뒤 편 에는 선묘의 영정을 모신 선묘각과 부석바위가 있다. 의상이 당나라에 갈 때 원효와 같이 동행했는데 무덤 속에서 해골물을 마신 원효는 귀국했지만 의상은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돌아올 때 문등현의 적산 법화원(장보고의 유적)에 들린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