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강좌 홈     ›     화엄강좌     ›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전설

“   의상과 선묘의 구원의 사랑   ”
부석사(浮石寺)는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 문무와(文武王) 16년에 고승 의상대사
(義湘大師)가 창건한 이래 우리나라 화엄종의 총 본산이었으며, 경내에는 천년 고적을 아직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으니 목조의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비롯해서 석등, 석탑, 본존불상과 조사당의 벽화 및 석조여래상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는 국보 사찰이다.

부석사의 유래를 살펴보면 ‚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왕명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하고 ‚ 화엄학을 전교(傳敎)한 의상조사는 서기 625년 당시 귀족의 가정에 태어나 호화롭게 성장하였다. 그 뒤 그는 서울 황복사에서 삭발하고 ‚ 중이 되어 입산수도를 했다. 입산한지 8년 만에 큰 뜻을 품고 원효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향했다. 당나라를 거쳐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까지 가려는 것이었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이르러 노숙을 하는 어느날 밤 ‚ 원효대사는 깨달은 바 있어 인도로 향하던 발길을 돌 려 귀국한 후 계속 불교 연구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나 의상조사는 홀로 당나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조사는 고구려 첩자에게 잡혀 고생을 하다가 귀국하여 650년에 다시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갔다. 양주(楊州)에 이르러서 신병을 얻게 되어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유숙하며 병을 치료하던 중 그의 딸 선묘(善妙)라는 처녀가 있어 몇 달이 지나자 어느덧 의상조사에게 연정을 갖게 되었다. 이에 조사는 선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법도로 대하여 제자로 삼게 되었다.

어느덧 그녀의 정성으로 몸이 완쾌한 조사는 다시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선묘가 조사에게 청하기를 “ 귀국하실 때 이곳을 지나시면 꼭 소녀의 집에 다시 한번 들려 주시고 가십시오 ” 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대사는 이러한 부탁을 쾌히 승락하고 길을 떠났다. 얼마 후 조사는 당나라 서울 장안 남쪽에 있는 종남산 (終南山) 지상사(至 相寺)에 가서 지엄대사(智嚴大師)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던 중 당(唐)이 30만 대군으로 신라를 침범하려는 형세 임을 알고 ‚ 오직 구국일념(救國一念)으로 문무왕 11 년에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 조사는 귀로에 양주 선묘의 집에 이르니 마침 출타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가는 것을 전해 달라고 그녀의 부모에게 부탁한 후 다시 길을 재촉 하였다.

한편 ‚ 선묘는 조사의 귀국 선물로 법의(法衣)를 정성껏 마련하여 손꼽아 기다리던 중 ‚ 잠시 집을 떠난 사이에 조사가 여정이 급하여 머물지 못하고 다녀갔다는 이야기 를 듣고 ‚ 만들어 두었던 선물을 가지고 조사를 뒤좇아 산동성(山東省) 해안에 다다르니 조사가 탄 배는 바다 위에 흰 돛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돛을 하 염없이 바라보고 섰다가 들고 있던 선물을 바닷물에 던지며 축원하기를 “ 진심으로 조사님을 공양하오니 원컨대 이 옷이 조사님께 이르도록 해 주옵소서 ” 하였다. 때 마침 해풍이 크게 일어나면서 던진 선물이 조사가 탄 배 안으로 날아갔다. 이를 보고있던 선묘가 다시 축원하기를 “ 이 몸이 용이 되어 조사를 받들어 무사히 귀국하도록 해 주옵소서 “ 하며 바닷물에 몸을 던지니 ‚ 기이하게도 선묘는 바랐던 대로 용이 되어 조사의 멀고 험한 귀국의 길을 줄곧 호위하였는지라 ‚ 조사는 무사히 귀국하여 나라 에 당의 침략 흉계를 고하고 난을 면하게 하였다.

그 후 조사는 왕으로부터 사찰 건립의 명을 받아 영주시 봉황산에 이르러 지세를 살펴본 즉 화엄종지(華嚴宗旨)를 크게 선양할 수 있는 명산이나 먼저 자리를 차지하 고 있는 이교(異敎)의 무리 5백여명이 점령하고 있으므로 수차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들이 막무가내로 듣지 아니하여 고심을 하고 있을때 ‚ 용으로 화신한 선묘가 공중에서 바라보니 순리로는 조사의 뜻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짐작하고 법력을 써 지금의 무량수전 서편에 있는 큰 바위를 공중으로 올렸다 내렸다 3차례나 하였더니 ‚ 무리들이 겁을 집어 먹고 ‚ 굴복하였다. 이 자리에 사찰을 건립한 것이 부석사이며 이교도들을 놀라게 하기 위하여 공중에서 세번이나 떴다는 큰 바위를 부석(浮石)이라 불러 무량수전 서편 암벽 밑에 거대한 모습으로 묵중히 앉아 있다.그리고 선묘룡(善妙龍)은 석용(石龍)으로 화하여 무량수전의 자리에 안 좌하여 부석사의 수호신이 되려 하므로 조사를 크게 감격케 하였다. 지면에서 2척 깊이에 묻혀있는 48척의 석룡은 그 머리를 무량수전 주불(主佛) 밑에 두고 꼬리는 무량수전 앞 석등까지 펼쳐 있다.

? 이 석룡은 67년 5월에 신라 5악 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 뜰에서 발굴하여 5m 가량의 석룡 하반부를 발견하는데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