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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불기 2553년 2월 3천배 기도안내
글쓴이 부석사 등록일 200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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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기 2553년 2월 부석사 삼천배 기도안내 ≪

* 일   시 : 2월 14일(토요일) 저녁 7시 00분 (매월 2째주 토요일)

 삼천배 기도는 무량수전에서 저녁예불(6시00분) 후에 7시부터 시작합니다.

     조금 늦게 도착하시는 경우에도 함께 하시고,

     기도시간 내에 삼천배를 다 못하신 분은 개별적으로 회향하시면 됩니다.  

    ♡ 삼천배 하시는 분 기도 시작전 기념 촬영합니다 .

* 준 비 물 : 절하기 편한 복장, 세면도구, 땀을 닦을 수 있는 수건,

                좌복위에 땀 떨어짐 방지를 위한 큰 수건을 개별적으로 준비하시면...

                 휴식시간에 체온의 손실을 막을 수 있는 두터운 옷을 준비하세요.

* 주의사항 : 휴식시간에 가능한 한 고체(떡 등을)를 먹는 것을 절제하시고, 

                  간단한 차나 따뜻한 음료, 당분 정도를 섭취하면 체력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 절하는 방법 : 2천배 까지는 500배 15분 휴식 2천배부터 400배 300배 300배 로                  

                    삼천배 책자 부처님의 명호와 함께 진행합니다.

                       청견스님의 절 지도참조: http://www.enlight.kr/bbs/zboard.php?☞  참조 :

                                     SBS스페셜 0.2 평  의 기적 절하는 사람들 :방송일 2007.4.8

                                     KBS 생로병사의 비밀 108 배 절 수행에 관하여 방송일 :2008.1.15

                        회향시각은 다음날 새벽 5:30

                        아침 예불에 이어서 삼천배를 회향한 후 휴식을 취하고 6:00시에 아침공양

 * 방사안내 : 거사님 방사가 부석사 공양간 불사 관계로 힘든 상황입니다
                    보살님 방사(50 명내외 )  


        
 * 공양안내 : 저녁공양은 오후 5:00


                    아침공양은  아침 6:00 - 7:00

 

 * 문의사항 : 종무소 054-633-3464


                   삼천배 지도 스님 무하 010-3628-3464


          불기 2553년  1월 3천배를 회향한 불자님들    축하합니다  성불하세요

민철기 이경민 최명순 안정심 최승복 김수안 최유리 박정은 진여성 김영진 김지연 김경석

박태돌 배음덕 박준수 이정숙 최말덕 이상용 박용운 박소영 권    일 자비행 정길성 김순복

김진영 김현정 이춘자 이옥순 김강민 김정훈 권맹옥 김미순 김석규  김삼원 김현우 이관숙

김정화 최휘열 이상이 최완규 장시덕 원현정 장현덕 채명희 김기영 진호철  안준현 안소영

김태경 김민정 김미선 이향난 김복년 최재호 석명균 이혜영 구말순 정호남 손여의주 손경미

손희제 신대권 신현아 신진아 김갑석 김주영 심용택 김혜숙 심수희 심상수 김혜석 진홍락

문세옥

 

                                     그럴 수 있어 하는 삶 어떨까요

 

미루는 습관이 삼천배 불자님들을 기다림에 지치게 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스님의 생활 자체는 온통 지각입니다. 무엇 하나 제 때 실천하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죄송한 마음으로 늦었지만 시작하려 합니다.

동지가 오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름이면 저녁 예불 때쯤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오른편 나무 가지엔

둥그런 보름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때는 녀석이 스님을 기다렸지만 이제는 스님이 기다립니다.

해가 제법 길어졌기 때문입니다.

 

스님에겐 낮에는 산으로 포행하는 즐거움이 있고 저녁 기도후엔 무량수전 문을 여는 기쁨이 있지요.

겨울이란 친구가 시리도록 차지만 맑고 신선하게 스님을 맞이해 주거든요.

문을 열면 하얀 옥빛의 보름달이 기다렸다는 듯이 스님을 질책으로 맞이합니다.

이렇게나 빨리 나오면 어떻게 해요 스님 하고 말입니다.

이 정도의 기도는 땡땡이밖에 안된다나요. 그 정도의 기도로는 그 무엇도 이룰수 없다는 겁니다.

옥빛 보름달 속에서  방아를 찧다 말고 던지는 옥토끼의 강도 높은 질책입니다.

자신은 이 추운 겨울에 스님의 아침 공양을 위해서 열심히 방아를 찧고 있는데 하는 투정일까요.

초강력 경책의 방망이에 쓰러질 찰나  어디선가 그럴 수 있지 하고 스님을 지탱해 줍니다.

이 친구는 공부를 마친 듯합니다. 양변을 넘어서야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으니까요.

보이겠지만 어느 별인지 모를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해 봅니다.

질책을 아끼지 않으면서 그래도 보름달과 별밤 친구들은 내심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눈치입니다.

이 시간에 이 공간에서 이 추운날 저를 보아 주는 스님인데 싫은 존재만은 아니겠지요.

양보다는 질 아니니  집중 집중 말이야 하고 이들에게 변명해 봅니다.

저도 열흘만 되면 기울어질거면서 하고는 핀잔을 흘리고는 서로에게 정을 나누어 봅니다.

스님을 경책했던 보름달이 공부가 무르익었다는 자신감에서 한풀 꺾인 기색입니다.

 

밤이면 별밤 친구들과 스님처럼 서로가 기다림의 정을 나누어 왔듯이

삼천배 기도 안내만 하기엔 어색해서 무심코 생각들을 이야기로 이어 왔었지요.

그러던 것이 이제 삼천배 불자님들의 기다림으로 자리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어

스님의 이야기 주머니가 어느 새 다음을 걱정하는 듯합니다.

이 추운 겨울에 저렇게 자신의 옷을 기꺼이 벗어 대지에 입혀주고는 무명으로 길을 잃고 헤매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자신의 갸날픈 가지에 무거우리만큼 둥근달을 맺어 길을 열어주는 나무 친구의

감사함을 생각하면서 두서 없고 향기조차 없는 생각이지만 이야기 삼아 이어봅니다.

 

나무들의 헌신으로 온전히 겨울을 나는 대지도 그 은혜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조금의 기다림을 함께 하다 보면 친구들의 가지가지마다 어느 하나도 외면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늘과 만나는 그곳으로 연출되어지는 봄은 대지의 하늘 은혜에 대한 보답입니다.

봄, 아직은 추워서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지만 슬쩍 추월해서 불자님들의 상상 속으로

모셔보겠습니다.

대지의 에너지를 봄이라는 계절로 보여 줄 때면 여기저기에서 야단들입니다.

처소에서 발을 옮기면서부터 개나리 민들레 홍매 산당화등의 친구들 인사말을 건네옵니다.

스님 안녕하세요 여기에요  거기 말구요 여기에요 여기 하고 말입니다.

고개를 이쪽 저쪽으로 돌려야 하지만 전혀 수고롭지 않습니다.

산으로 포행을 나서볼까요.

생강나무 꽃몽우리가 먼저 인사를 건네옵니다.

스님 아직도 부석사에 계세요 ...   신도님들 지루하겠다...

신선하고 잘 생긴 스님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눈치입니다.

스님은 미소로  위기를 슬쩍 모면해 봅니다.

스님 그쪽 말구요 이쪽요 이쪽 ...   둥글래가 막 대지 위로 고개를 내밀면서 스님 이전보다

말랐네요 살좀 찌세요 하는 것이 걱정스런 표정이구요.

스님 스스로는 모르겠는 걸 ...  그럴 수 있다 싶습니다.

둥글래 녀석의 입장이 더 객관적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길을 오르는 동안 여기저기에서 훈훈한 봄의 인사가 들려 옵니다.

이들 중에서 계절에 관계없이 여여(如如)한 친구가 바로 소나무입니다.

삼매가 평상심인 듯 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도 한결 같습니다.

매서우리만큼 차갑고 강한 소백산의 바람에도 성성적적입니다. 우리들의 성품이지 싶습니다.

녀석들의 봄 인사에 쑥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고개를 떨군체 걸음을 재촉할 때쯤

그럴 수 있지 하고 운을 띄워주는 다정하고도 고마운 친구가 소나무입니다.

보려면 바로 보아야지 한결같은 스님의 성품을 말이야... 너희들 눈을 먼저 뜨고 귀를  열 생각을

해야지 열리지 않은 눈으로 보니까 그렇지 하면서 이름 모를 나무 새싹들에게 난감한 봄인사를 법문

으로 그치게 하고 스님의 고개를 일으켜 세워주는 지혜를 펼쳐 보이는 친구가 소나무입니다. 

 

그럴수 있어 라는 생각 그냥 산출되어지는 것은 아니지 싶습니다.

서로에게 보여지는 양변은 서로의 본 모습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알아차림은 양변을 거두어 주기에 인사를 하는 쪽도 받는 쪽도 하나로 되어집니다.

알아차림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즉 육근(六根)의 연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알아차림은 사실 그대로를 볼 수 있게 합니다.

 

부석사에 들려오는 봄의 소리에 잠깐 귀 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요.

항상 신선한 소리의 주인공 시자 스님의 말입니다.

점심 공양 중 들려오는 봄의 소리입니다.

요즈음 스승과 제자 간의 분위기가 사뭇 새롭다면서 하는 말이지요

스승이 제자에게 경책을 하는데 제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 본다는 겁니다.

이에 스승은 눈을 그렇게 뜨고 쳐다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하자 제자 왈 선생님 눈을 네모나게도

뜨나요 하고 스승님의 고개를 떨구게 한다나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오고간 느낌들 알아차림의 지혜로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스님 속으로 다가온 봄의 향기도 함께 나누면 어떨까요.

독일에서 온 편지 한쪽입니다.

삼천배 기도 안내가 답장이 되지 싶어 따로이 편지를 한 기억이 없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미안함을 전합니다.  거사님은 독일 분이고 대학원에 진학중인 추희숙 보살님의 편지 한 쪽 열어

봅니다. 

새해인사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무하스님

잘 지내시죠?

가끔씩 들리는 부석사 스님의 블러그에서 좋은 글 읽고 있습니다.
매번 감사인사 드리고 싶지만 게을러서 잘되지 않네요.
한해가 가도 새해가 되면 새롭게 새해계획을 세우고 청소를 하고 주변을 정리를 하고 야단을 떨지만 정녕 스님께서 글로 쓰신것처럼 내 맘속에 도사리는 탐,진,치의 찌꺼기는 그대로 둔채 몇생을 살아왔을까 합니다. 속상한 일입니다.
어리석어서, 잘몰라서 보내온 생활을 이젠 접고 맑고 밝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무명으로 가려져 보이지않아 꿈속을 헤메면서 살아온 삶과도 이젠 이별을 하고
참 행복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12월 31일 24시에도 저의 어리석음으로 남편에게 화를 내고 남편을 슬프게 했습니다. 찰나에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 화라고 하는 녀석이 저를 점녕해 버립니다.
알아차리고 금방놓아야 한는데 업식이 두터운지라 놓지않고 바둥거립니다.
공부가 쉬운듯 하면서도 막상 닥치면 쉽게 되지않습니다.
이 생을 다할동안 풀어가야 할 저의 과제입니다.

스님 다음에 만나면 좋은 법문과 수행담을 듣고싶습니다.

건강하! 시고 성불하세요.

독일에서 추희숙 합장

이 한 쪽의 편지를 보더라도 희숙 보살님은 비교되리만큼 스님보다 훌륭한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 합니다.  진심이 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림 하지 못했다는, 그 순간에 깨어있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이것은 이미 스스로를 반조하는 알아차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기에 자책할 

이유는 아닌 듯 합니다.  무명으로 인해 되어지던 삶이 안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끌어 안았기에

이미 그럴 수 있는 삶이 되어지고 있지 싶습니다.

이제는 화내는 위험함은 점점 사라지고 행복의 시간들 함께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티벳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늘 들려준다는 한 구절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기다림의 시간을

접을까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는 울었고

내 주변에 모든 사람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나는 웃었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슬퍼 울고 괴로워 하였다.

한편에선 생하면서 울고 떠나면서 웃었고, 한편에선 웃었고 또 울고 괴로워 했습니다.

이 세상에 나오면서 울었던 것은 되어지는 삶의 순간들입니다.

떠나면서 웃을 수 있었던 삶의 순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되어지는 삶 안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실천의 산물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삶이지요.

 

이 세상에 태어남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던 것은 되어지는 삶의 순간들입니다.

이 세상을 떠남을 보고 슬퍼하고 괴로워 했던 것도 역시 되어지는 삶의 순간들입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자기식 자신의 업력에 의해 되어지는 삶을 자신이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돌이켜 봄은 어떨까요.

위에서 보았던 봄의 인사... 봄의 소리... 봄의 향기... 이 모두와 더불어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우리들은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창조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될 지 모르겠지

만 부처님의 가르침의 실천이 부여 되지 않는다면 이는 이미 자신의 업력에 의한 되어지는 삶이지

싶습니다.

이렇게 마지막 순간인 임종을 맞을 때에도 임종을 맞이하는 이나 지켜보는 이 모두가 그럴 수 있는

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삶 속엔 웃고 우는 기뻐하고 슬퍼하는 양변을 넘어서는 실천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삶이 되기 위해선 부처님의 가르침이 자신에게 이르도록 해야 하지 싶습니다.

또한 이러한 실천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 결정해 주는 문제가 아닌 듯 합니다.

자기 스스로가 꿰뚫어야 하지 싶습니다.

자신의 견문으로 다시 듣고 아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가르침대로 지금 들숨 날숨 몸의 느낌을 알아차리고 또한 그 아는 마음으로의 반조를 우리들의

되어지는 삶 안으로 끌어들이는 겁니다.

이것이 그럴 수 있어야 나아가는 힘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삶이 아니라면 업력으로 되어지는 삶일뿐더러 이러한 삶은 또 다른 업을 더해가는

삶이 되지 싶습니다.

성서의 창세기에서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을 흙으로 만들고 코로 생기를 불어 넣고

다시 자유의지를 부여 했다 합니다.

흙과 생기와 자유의지 이는 개체적인 나입니다. 이 개체의 주인인 하나님 또는 성령 불성으로 

불리어지는 이것이 우리들의 개체를 여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몸과 자유의지 몸과 마음 사이에 호흡이 있습니다

이 들숨 날숨을 알아차림해 간다면 그럴 수 있는 삶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실천해 갈 때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또 스스로가 그 의문들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여러분 지금 호흡 들숨 날숨이 되어지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들숨과 날숨의 작용이 있을 때 알아차림의 노력을 아끼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러한 실천을 함에 있어서는 돈을 필요로 하는 것도 특별한 장소를 필요로 하는 것도 특정한 

상대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몸이 있고 호흡 들숨 날숨만 있으면 되니까요.

지금 바로 알아차림해 봅니다.

그럴 수 있는 삶,

과거를 돌이키는 것에도 있지 않습니다.

미래를 펼치는 것에도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현재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림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지 싶습니다.

 

우리들의 성품은 되어지는 삶에서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 있는 삶으로 돌아오기를 말입니다

자 지금 들숨의 문을 들여 봅니다.

자 지금 날숨의 문을 내어 봅니다.

우리들의 성품은 기꺼이 문을 열어 우리들을 맞아 주리라 믿습니다.

 

                 무 하                    합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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